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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gwvp9iptcd1 2020.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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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식(金富軾)이 서경성(西京城)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니, 조광(趙匡)이 스스로 분사(焚死)하였습니다.
적(賊)의 괴수 최영(崔永)을 잡아서 주살(誅殺)하니, 서경이 평정되었다.
당초에 조광 등이 관병(官兵)이 토산(土山)을 쌓아 핍박합니다 하여, 성안에다 중성(重城)을 쌓으려 하였습니다.
김부식이 말하기를,“적이 비록 성을 쌓는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하였는데, 윤언이(尹彦頤)·지석숭(池錫崇)이 말하기를,“대군(大軍)이 출전(出戰)한 지 이제 이미 2년이 되었으나, 헛되이 세월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텨 왔으니, 사변(事變)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가만히 군사를 보내 돌격하여 중성(重城)을 깨뜨려서 성공하게 함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김부식이 듣지 않았습니다.
윤언이가 굳이 청하자, 이에 정예병(精銳兵)을 세 길로 나누어 진경보(陳景甫) 등은 3천 인을 거느려 중도(中道)가 되고, 지석숭 등은 2천 인을 거느려 좌도(左道)가 되고, 이유(李愈) 등은 2천 인을 거느려 우도(右道)가 되게 하였으며, 장군 공직(公直)은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석포도(石浦道)로 들어가고, 장군 양맹(良孟)은 거느린 군사를 가지고 당포도(唐浦道)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또 여러 군사들로 하여금 길을 나누어 성을 공격하게 하여 적의 세력을 분산시키게 하고는, 군대 행렬의 질서가 잡혀진 다음 군사들에게 후사(厚賜)하였습니다.
김부식이 돌아와 중군(中軍)에 이르렀는데, 밤 4고(四鼓)에 이르러 경기(輕騎)가 전군(前軍)에 달려들어오자, 여러 장수들을 통어(統御)하고 크게 거사(擧事)하게 하였습니다.
정사일(丁巳日) 어둑새벽에 진경보가 거느린 군사들은 양명문(楊命門)으로 들어가서 적의 목책(木栅)을 함락하고, 나아가 연정문(延正門)을 공격하였으며, 지석숭이 거느린 군사들은 성을 넘어 들어가서 함원문(含元門)을 공격하였고, 이유가 거느린 군사들도 또한 성을 넘어 들어가서 흥례문(興禮門)을 공격하였으며, 김부식은 아병(衙兵)을 거느리고 광덕문(廣德門)을 공격하였습니다.
적도(賊徒)는 아군(我軍)의 토산(土山)이 미처 완성되지 못한 때문에 설비(設備)하지 않았던 것인데, 여러 군사들이 돌진해 이르자, 두려워서 당황한 나머지 조치(措置)하는 바가 없었다.
김부식이 김정순(金正純)과 더불어 싸움을 독려하니, 장사(將士)들이 모두 다투어 분발하고, 모든 군사가 또한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놓아 성옥(城屋)을 불사르니, 적병은 크게 무너지고 관군은 승세를 타고서 함부로 적의 목을 베었다.
김부식이 명령하기를,“적을 사로잡는 자는 상을 주겠지만, 항복하는 적을 죽이거나 표략(剽掠)하는 자는 죽이겠다.
”하니, 군사들이 모두 칼날을 거두고 진군하였습니다.
때마침 날이 저물면서 비가 내리자, 군사들을 지휘하여 물러나게 하고, 사로잡은 자와 항복한 자들은 순화현(順化縣)으로 보내어 음식을 먹이게 하였습니다.
이날 밤에 성중이 전쟁에 패해 어지러워지자, 조광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온 집안이 스스로 불을 질러 타죽었다.
낭중(郞中) 유위후(維偉侯)·팽숙(彭淑)·김현근(金賢瑾)은 모두 목을 매어 죽었고, 정선(鄭璇)·유한후(維漢侯)·정극승(鄭克升)·최공필(崔公泌)·조선(趙瑄)·김택승(金澤升)은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적(賊)이 그 괴수 최영(崔永) 등을 붙잡아 나와서 항복하니, 김부식이 이를 받아 하옥시키게 하고, 군사들과 백성들을 위유(慰諭)하였습니다.
노인과 어린이 및 부녀들에게는 성에 들어가서 집안을 보호하게 하고, 군사들을 나누어 여러 문(門)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어사 잡단(御史雜端) 이인실(李仁實), 시어사(侍御史) 이식(李軾), 어사(御史) 최자영(崔子英)으로 하여금 성에 들어가서 부고(府庫)를 봉하게 하였으며, 또 김정순·윤언이·김정황(金鼎黃)으로 하여금 군사 3천 인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서 관풍전(觀風殿)에 머물러 있으면서 성중에 호령(號令)하여 노략질을 금하게 하였습니다.
기미일(己未日)에 낭중(郞中) 신지충(申至冲)을 수습 병장사(收拾兵仗使)로, 내급사(內給事) 이후(李侯)를 백성 화유 안거사(百姓和諭安居使)로, 원외랑(員外郞) 박정명(朴正明)을 창고 감검사(倉庫監檢使)로, 합문 지후(閤門祗候) 이약눌(李若訥)을 객관 수영사(客館修營使)로, 녹사(錄事) 최유칭(崔褎偁)·백사청(白思淸)을 나누어 성내 좌우 순검사(城內左右巡檢使)로 삼았습니다.
신유일(辛酉日)에 김부식이 경창문(景昌門)으로 들어가서 관풍전(觀風殿) 서쪽에 앉아 오군 병마 장좌(五軍兵馬將左)들의 하례(賀禮)를 받고,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황(城隍)과 신묘(神廟)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거민(居民)을 무위(撫慰)하였습니다.
병마 판관(兵馬判官) 노수(魯洙)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어 헌첩(獻捷, 승전(勝戰)하여 포로를 바침)하게 하고, 제서(制書)를 받들어 최영(崔永)과 장군 황인(黃麟)·덕선(德宣), 판관(判官) 윤주형(尹周衡), 주부(注簿) 김지(金智)·조의부(趙義夫), 장사(長史) 나손언(羅孫彦)을 참(斬)하여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하였습니다.
분사 호부 상서(分司戶部尙書) 송선유(宋先宥)는 병란이 일어나고부터 병(病)을 칭탁하고 집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고, 장서기(掌書記) 오선각(吳先覺)은 어리석은 체하며 적을 붙좇지 않았으며, 대창승(大倉丞) 정총(鄭聰)은 효행(孝行)으로 알려졌으므로 모두 문려(門閭)에 정표(旌表)하였습니다.
의학 박사(醫學博士) 김공정(金公鼎)은 조광이 김부식이 보낸 좌랑(佐郞) 노영거(盧令琚)를 모살(謀殺)하려는 것을 알고 은밀하게 고하여 피하게 하였고, 소감(少監) 위근영(韋瑾英)은 노모(老母)가 있어 적을 배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한유관(韓儒琯)·안덕칭(安德偁)·김영년(金永年)과 더불어 거짓으로 상여(喪輿)를 만들고 송장(送葬)하는 것과 같이 하여 장차 문을 나가려고 합니다가 일이 누설되어 위근영·한유관이 볼기를 맞고 단근질당하여 죽기에 이르렀으나, 끝내 끌어대지 않았으므로 안덕칭·김영년 등이 위해(危害)를 면하게 되었다.
김공정 이하 여러 사람들과 윤첨(尹瞻)의 친속(親屬), 노인·어린아이·폐질자(廢疾者)는 모두 용서해 주었다.
그 나머지 양반(兩班)들은 모두 붙잡아 경사(京師)에 보내어 하옥(下獄)시키되, 날래고 사납게 항거한 자는 ‘서경 역적(西京逆賊)’ 네 글자를 경면(黥面)하여 해도(海島)에 유배(流配)하고, 그 다음은 ‘서경(西京)’ 두 글자를 경면하여 향곡(鄕曲)·부곡(部曲)에 나누어 유배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여러 주부 군현(州府郡縣)에 나누어 두고 그 처자(妻子)는 편한 대로 거주(居住)하도록 들어주고, 양인(良人)이 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조광·최영 등 7인과 정선·김신, 김신의 아우 김치(金致), 정지상(鄭知常)·이자기(李子奇)·백수한(白壽翰)·조간(趙簡)·묘청(妙淸)·유참(柳旵), 유참의 아들 유호(柳浩), 정덕환(鄭德桓) 등의 처자(妻子)는 모두 몰수(沒收)하여 동북(東北) 여러 성의 노비(奴婢)를 삼았습니다.
간관(諫官)이 탄핵(彈劾)하여 아뢰기를,“문공인(文公仁)은 묘청(妙淸) 등을 천거하여 임용하게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생령(生靈)에게 해독을 끼치게 하였습니다.
”하니, 이에 문공인을 수태위 판국자감사(守太尉判國子監事)로 좌천(左遷)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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